국창 박동진이야기

박동진, 우리것 소중함 일깨운 큰 소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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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62회 작성일 22-01-1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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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3-07-08 19:57]

우리 시대의 광대, 명창 박동진이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고인은 다른 국악인에 비해 친숙하게 국악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국악의 전도사였다. 1994년 ‘쿵딱, 제비몰러 나간다~’(판소리 ‘흥보가’ 중)로 시작되는 의약품 CF에서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고 호방하게 내지르던 광고카피는 한국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인 박동진 명창의 부음이 전해지자 그의 제자들을 비롯, 함께 활동했던 소리꾼들은 슬픔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국악사상 최초로 완창 판소리를 시도하며 국악의 대중화를 이룬 그의 발자취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듯싶다.


한국국악협회 이영희 이사장은 “박선생 이전에는 완창발표회라는 형태가 없었다. 그는 판소리가 사라져갈 무렵 판소리의 부활을 이룬 선구자였다. 판소리의 거목이 ‘세월’ 앞에 무너지다니 안타까울 뿐”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30년동안 박동진의 고수로 호흡을 맞춰왔던 주봉신씨는 “죽음을 믿을 수 없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프다”며 “그는 판소리 다섯바탕 외에 ‘변강쇠전’ ‘배비장전’ ‘옹고집전’ ‘숙영낭자전’ ‘예수전’ ‘이순신전’ 등 고전과 창작을 넘나들며 다양한 판소리를 완창했다. 다섯바탕도 각각 다른 스승을 사사했기 때문에 그의 소리는 무척이나 화려하고 다양했다”고 전했다.


주봉신씨는 또 고인이 ‘이순신전’의 경우 9시간40분 동안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물만 마시며 완창했는데 고수가 5명이나 바뀌었지만 고인은 꼿꼿이 무대를 지켰다”며 ‘이순신전’에 대한 비화도 들려주었다. 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충남 현충사에서 이순신 장군을 참배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를 틀었는데, 마침 박동진 명창이 국립극장에서 부르는 판소리 ‘이순신전’이 중계되고 있었다는 것.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박명창의 소리를 듣던 박대통령은 차를 국립극장으로 돌리게 해 박명창의 공연을 30분 정도 감상했는데, 당시 국립극장은 예정에 없이 대통령이 방문하자 일대 난리가 났었다는 것이다.


박명창과 함께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신영희씨는 “국립창극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같이 무대에 서곤했는데, 욕과 우스갯소리를 적절히 섞어 주위를 웃기곤 하셨다. 지난해 뵐 때 ‘신영희는 답답하리 만큼 완벽한 통성을 고집한다. 꾀를 부릴 줄 모른다’고 하시던 말씀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군산대 최동현 국문과교수는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그의 소리 기량과 활동의 다양함은 아무도 따를 이가 없다”며 “근대 5명창인 대가들을 골고루 사사해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로 재창조했고, 판소리공연시 사설이나 곡조를 즉흥적으로 붙여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또 판소리의 재담이나 익살 등을 유달리 구수하고 걸쭉하게 구사해 판소리에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의 혼마저 쏙 빼놓았다”고 대가의 족적을 되짚었다. 그러나 즉흥적이고 일정한 형태가 없는 소리를 구사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박동진 명창은 왜 소리에 빠졌을까. 대전중 3학년이던 열여섯살에 협률사(음악공연단체)의 공연을 보고 홀딱 반한 그는 소리를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집을 나서 전국의 유명하다는 선생들을 찾아 소리를 익혔다. 고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져있던 천재성과 신명이 협률사소리에 의해 터졌기 때문일 터이다. 박명창은 34년 정정렬로부터 판소리 ‘춘향가’를, 35년 유성준으로부터 ‘수궁가’를, 36년 조학진으로부터 ‘적벽가’를, 37년 박지홍에게 ‘흥보가’를, 38년 김창진에게 ‘심청가’를 차례로 배웠다. 하루 18시간씩 연습했고 목소리를 틔우기 위해 똥물도 40그릇이나 들이켰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대 초반까지 판소리학습을 끝낸 박동진은 요리집에서 소리를 해서 돈을 벌고 대가들과 함께 무대에 서면서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무절제한 생활로 목이 상해 버린 것이다.


결국 소리꾼의 고수와 무대감독 등을 하던 그는 62년 국립국악원에 들어가 다시 소리 공부를 했고 67년에는 국립창극단에 입단했다.


그는 “젊어서 못된 짓을 많이 혀서 목을 버려 놓았응게 목만 다시 찾으면 죽어도 원이 없다”고 와신상담했고, 마침내 68년 국내 최초로 다섯시간에 걸쳐 판소리 ‘흥보가’를 완창하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소리꾼들은 무대에서 20분만 소리를 하더라도 상찬을 받았기에 10~20분 정도의 토막소리를 배워 부르곤 했었다. 그런데 박동진이라는 무명이 출중한 소리와 익살맞은 대사로 다섯시간동안 판소리를 완창하며 청중들을 사로잡았으니 공연계가 발칵 뒤집힐 만도 했을 것이다. 이듬해에는 판소리 ‘춘향가’를 여덟시간에 걸쳐 완창했으며 이어 70년 ‘심청가’, 72년 ‘수궁가’ 등 판소리 다섯 마당을 차례로 완창했다.


그의 완창판소리는 당시 잊혀져가던 판소리를 새롭게 부흥시키고 수많은 명창들이 완창 판소리에 도전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73년 58세에 ‘적벽가’로 인간문화재에 지정된 박명창은 기교에 능한 소리를 비롯, 창조적인 아니리(대사)와 짜임새있는 너름새(연기)로 인기몰이를 지속했다. 그의 공연특징으로는 서민적인 분위기를 단연 꼽는다. 비속한 언어, 음담패설, 욕설까지 자연스레 구사해 서민적 생기를 무대에 불어넣었고 이를 통해 국악의 대중화를 이룬 것이다.


최근까지도 자신의 고향 공주에 설립한 박동진 판소리전수관을 통해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그는 평생 소원 중 두가지를 이루지 못한 채 우리곁을 떠났다. ‘불교대전’과 ‘진주 논개전’이 그것이다. 기독교신자였지만 창작판소리 ‘불교대전’을 부르고 싶어했고, ‘진주 논개전’은 작품구성을 완성하고도 발표하지 못했다. 그리고 97년 작고한 부인 변녹수씨의 뒤를 이었다.


〈유인화기자 rhew@kyunghyang.com